우리의 경험이 사용되는 것은 개인의 영역을 벗어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집단 무의식이라 불립니다.
마음에 예상豫象(미리 마음에 그림이 떠오르다)이 일어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의미하는 바를 경험적으로 자각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미래를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경험’이라는 마음의 데이터를 개인의 경험에만 국한하지 않고 인간의 집단무의식을 포함한다면, 마음에 떠오르는 우리의 예상도 인류적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통찰력게임의 주제가 ‘나’에 한정되지 않고 나의 가족과 친구들, 내가 속한 단체에 속하거나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예상도 그에 맞춰 집단적, 인류적이 될 것이며, 그때는 우리의 더 깊은 집단무의식이 쓰일 것입니다. 그래서 통찰력게임의 주제가 더 넓고 포괄적이라면 거기에 사용되는 경험은 집단적이고 인류적 경험의 무의식 데이터가 사용되는 것이며, 그때 우리는 ‘개인’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more
책상 위에 커피잔과 펜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공간이 있습니다.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게 하는 것은 그 사이의 공간입니다. 그와같이 마음속 현상의 분별도 내적인 공간을 기반으로 합니다. 내적인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그냥 다르다, 아니다.’라는 느낌으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즉, ‘이 느낌과 저 느낌이 다르다.’는 인식이 곧 느낌의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대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외적인 사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눈앞에 있는 탁자의 외부 경계선 한점에 눈의 초점을 맞추고 오래도록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그 경계의 느낌을 느껴봅니다. 맨 처음 본 그대로 경계선이 유지되나요? 경계선이 왔다 갔다 하거나 희미해지거나 모호해질 것입니다. 시각적으로 맨 처음 보았던 경계선의 느낌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경계선은 변하는데, 우리는 ‘저건 탁자지. 그리고 탁자는 탁자 아닌 것과는 완전히 달라.’라는 생각으로 처음 본 그 경계선의 느낌을 완전히 고정시켜버립니다. 실제 눈으로 보는 느낌은 고정돼 있지 않고 달라지는데, ‘탁자’라는 이름을 붙여 놓으면 그때부터 그 경계선이 변함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이름’은 느낌을 고정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의식’은 고정화된 느낌에 붙여진 ‘이름’들의 네트워크인 ‘생각’으로 작동합니다.
생각으로는 새로운 통찰을 이루기 힘든 이유가 바로 이때문입니다. 의식의 세계는 고정되어 ‘아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통찰은 고정화되지 않은 느낌들로 가득한 무의식에 접속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거기서는 다른 느낌들과의 통합이나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무한히 있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 통찰력게임은 절실한 ‘주제’를 요구합니다. 그 다음으로 결론내지 않은 마음으로 기다려보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이 일은 이렇게 될 것이다’거나 ‘저렇게 되어야 맞아’라는 생각에 고정되지 않은 채 모호한 상태로 있게 되면 틀지워진 ‘생각’에서 열린 가능성의 ‘느낌’으로 다가가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느낌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깨질 때 느낌은 자유롭게 다른 느낌들과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통찰을 위해 우리는 다시 그 느낌의 모호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내지 않는 찾는 마음으로, 주제를 향하여…more
하나의 사물을 지속적으로 보다보면 더 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은 오히려 거기서 점차 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시도해보십시오. 즉 하나의 사물을 계속 보면 그것이 가진 형태나 질감이 점차 바뀌거나 흐릿해지거나 초점이 흐려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변함없는 한 가지’에 오래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 ‘아는 것’에 주의를 계속 쏟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계속 눈을 깜빡이면서 사물을 보아보십시오. 또는 계속 그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려 하며 거기에 주의를 주면서 집중해보십시오. 그러면 좀더 오래 선명하고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을 깜빡이는 것은 대상을 새롭게 하는 물리적 행동이며, 새로운 측면을 찾아 나서는 것은 대상을 심리적으로 새롭게 보는 행동입니다.
우리 마음은 이렇게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마음을 생생하게 살아있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의 특성을 통찰을 일으키는 데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가장 밑바닥에는 절실한 주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표면에서는 자꾸 옆길로 새어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빈틈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짜여진 길에서는 통찰이 나오기 힘듭니다. 길에 샛길이 많고, 빈틈이 주어져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여지가 생깁니다.
그래서 통찰력게임에서는 무의식에 침투할 만한 강렬한 열망으로 주제를 심층에 심어놓고, 이제 다양한 카드의 문장과 단어들을 통해 샛길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이때 마음은 신선한 주의를 계속 주제에 쏟아부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제에 계속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틀 속에 갇히게 하여 지루함과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좌절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빈틈을 열어놓기, 또는 샛길을 많이 만들기, 이것이 통찰을 향한 또 하나의 길이 됩니다….more
과거 경험經驗(지나가며 사실로 경험한 것) : 통찰력게임은 생명력 카드를 통해, 내 주제와 연관해 힘이 되어줄 과거 경험을 되살리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카드에서 지난 경험들이 떠오른다. 거기서 새로운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정작 일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그 일 속에 포함되어 있어 전체 일이 돌아가는 것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다 지나간 시점에서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면 일이 그렇게 일어나야 했던 전체 구조가 더 높고 넓은 안목에서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 목적目的(눈이 과녁을 향하는 것) : 게임에서 정한 자신의 주제는 앞으로 나아갈 미래의 길을 방향 잡아 준다. 내가 나아가야할 길인 목적을 분명히 하면, 전체 내 삶의 구조는 그 목적을 향해 재구성 된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일이 ‘현재 일은 그렇게 일어나도록 되어있다’라는 것은 없다. 일은 지나간 과거 경험으로 인해 형성된 나의 무의식적 패턴과, 나의 미래 목적과, 현재의 내 의지가 어우러져 일어난다. 특히 나의 목적이 무엇이냐, 내가 정한 방향이 무엇이냐에 따라 일은 크게 달라지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지나간 경험은 이미 일어났고, 현재 상황도 지금 벌어지고 있으므로, 거기에 내가 정한 목표와 목적이 얼마나 강한 의지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이 구조에 새로운 ‘전체’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정한 ‘목적’이 앞으로 일어날 전체 그림의 중요한 해부도가 된다.
현재 통찰洞察(꿰뚫어 살펴 앎) : 원하는 미래 또는 원하는 목표 즉, 게임의 주제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통찰이 일어날 중요한 지점이 있다. 이 질문이 통찰력 게임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 현재의 행동을 이루는 것이 바로 통찰력게임의 ‘깨어있기’, ‘어울리기’, ‘생명력’, ‘위기’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통찰이 깨어있기이고, 관계에 대한 행동이 어울리기이며, 이루기 위한 에너지가 생명력이고, 그에 대한 장애를 보고 넘어가는 것이 위기카드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통찰력게임에서 이 네 가지 카드가 지니는 의미는 대단하다. 바로 과거와 미래를 분명히 함으로서 현재 당신의 행동을 재구성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현재가 미래의 주제에 맞추어 재구성되면 삶은 당신의 미래에 이루고자 하는 주제에 맞추어 재구성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원하는 대로 ‘이루어가게’ 하는 게임의 핵심이다….more
의지意志란 무언가에 뜻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로 향하는 힘을 갖춘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는 일종의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무언가에 뜻을 두고 그쪽으로 향한다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즉, ‘그쪽’이 있기 위해서는 그쪽이 아닌 다른 쪽이 배경으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동쪽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세우려면 동쪽이 아닌 서쪽과 남쪽, 북쪽이 있고 그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서남북이라는 전체 그림을 전제로 해야 동쪽으로 가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집니다.
이 전제가 되는 그림을 의도意圖라고 합니다. 도圖는 그림이라는 말입니다. 의도를 배경으로 의지가 작용하며, 여기서 의도란 일종의 스토리story이기에 모든 의지는 스토리를 갖게 됩니다. 이렇게 의지와 의도는 긴밀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스토리란 일종의 구조構造이며, 이 의식적 구조는 곧 에너지를 발생시킵니다. 그것을 건축학에서는 텐세그리티tensegrity, tensional Integrity라고 합니다. 구조가 발생시키는 긴장 상태, 즉 에너지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것이 발생시키는 에너지의 크기는 달라집니다.
의식적 구조인 이 스토리의 내용이 개인에 국한되면 의지energy 역시 개인영역에서 작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이 스토리가 주변과 전체를 포함한다면 즉, 통찰력게임의 주제가 나와 내 가족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 그 주제 즉 스토리는 국민 전체의 집단무의식이 발현시킬 수 있는 더 커다란 에너지를 갖게 됩니다.
이때 통찰력게임의 주제는 개인을 넘어 사회의 집단무의식에까지 뚫고 들어가 더 크고 놀라운 지혜를 보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주제를 절실하면서도 전체를 위한 것으로 잡으면 더 큰 에너지와 지혜를 쓸 수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자신의 삶의 의도를 더 크고 넓게 잡을 때 더 강력한 에너지와 깊은 지혜를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Leiden University에서 행한 연구에 의하면 ‘열린 모니터링 명상open monitoring meditation’을 행한 후에 창조성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는 백일몽을 꾸는 듯이 마음을 지향점 없이 방황하게 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모든 생각과 감각정보를 제한없이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 깨어있는 낮의 상태에서 우리 마음은 어떤 지향점을 갖고 거기에 몰두해있기 때문에 ‘그것 외의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닫혀있다. 그런데 마음을 자유롭게 방황하도록 풀어놓아주면 이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며 더 깊고 방대한 무의식적 정보가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통찰력게임에서 ‘순간’에 집중하게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순간’에 올라오는 것에 집중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올라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는 마음은, 어딘가로 향해 가는 ‘지향’하는 마음이 아니라 ‘지금 나타나는 것’을 수용하는 마음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무언가 한 가지에 집중하는 마음은 통찰을 일으키는 힘이 약하다. 그것은 마음이 한가지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떠오르지 못하게 막는 기능을 하여, 점차 마음은 고요해지고 가라앉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평화를 얻는 좋은 방법이지만 창조성과 통찰을 얻기에는 부족한 방법으로 그것을 불교명상에서는 ‘선정禪定’으로 가는 길이라 한다. 즉 집중명상인 사마타 명상은 주의집중 명상focused attention meditation이고,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 불리는 위파사나 명상이 바로 열린 모니터링 명상open monitoring meditation과 유사하다. 이것을 우리 전통의 수련법에 대비하면 지관止觀 수련법인데, 지止란 ‘멈추는’ 방법이고, 관觀이란 열린 마음으로 ‘보는’ 수련법이다. 그중 이 ‘관’하는 수련을 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정보를 여과없이 드러나게 하여 창조성이 극대화되도록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위파사나는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면서 ‘이것도 내가 아니고’, ‘저것도 내가 아니고’를 파악하여 동일시를 벗어난 무아에 이르기 위한 것에 중점을 둔다. 여기서 약간 방향을 틀어, 그것을 일종의 정보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열린 모니터링 명상이라는 레이던대학교의 창조성 테스트였던 것이다….more
분노는 우리 마음을 혼돈으로 몰고가지만, 적당한 분노는 면역계를 활성화 시킨다. 적당한 불안은 지성을 불러일으키는데, 불안이란 선택할 대상 두 가지를 상상해낼 정도로 지성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우울 즉 삶에 대한 허무의 우울은, 삶의 자잘한 문제들을 우습게 보도록 해주며 그것을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하는 큰 마음을 지니게 해준다. 이렇게 우리가 부정적이라 여기는 마음의 상태에 어느 정도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면 그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의식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일말의 방향성을 투입하고 기다리면 질서가 태동된다. 즉, 혼돈의 무의식에 일정시간 동안 나의 의도가 유지되면, 혼돈속의 데이터가 재정렬 되면서 어느 순간 질서를 갖추게 된다. 그것이 통찰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의 혼돈에 ‘절실한 주제’라는 ‘의도’가 방향성을 형성해 적당한 시간동안 숙성되면 원하는 지혜를 얻게 되리….more
로켓은 지구의 ‘대기권’을 뚫는데 그가 보유한 대부분의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대기권은 지구를 안정적인 환경으로 만들어주는 훌륭한 보호막이지만 동시에 이곳을 벗어나는 데는 커다란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틀을 벗어나기만 하면 이제 아주 작은 힘으로도 원하는 방향을 향해 움직여갈 수 있게 됩니다. 이와 똑같이, ‘자아’라는 틀은 우리를 보호하는데 훌륭한 방어막이 되어주지만, 그러하기에 이 틀을 뚫고 나가야할 필요가 있을 때는 참으로 지난한 장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통찰력 게임은 무의식에 접근하여 깊은 지혜를 길어올리는 훌륭한 도구이기에 ‘자아’라는 일상의 틀을 뚫고 나와 무의식의 바다에 들어서야 하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절실한 주제입니다. 절실한 주제는 ‘자아’라는 틀을 뚫고 나가게도 해주는 로켓의 연료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의 바다에 무작위로 산재해있는 방대한 데이터를 ‘주제’라는 하나의 방향으로 재정렬 시켜주는 중요한 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에너지를 갖춘 로켓인, ‘절실한’ 주제를 찾는 것이 통찰력 게임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는 필수 조건입니다….more
빛과 소리는, 감각수용기sensory receptor를 거쳐 마음에 이르면, 이미지와 멜로디로 ‘인식’됩니다. 그렇게 감각수용기는 날것인 자연의 정보를 받아들일 뿐, 마음이 그 정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조정이 필요합니다. 이때 빛의 덩어리는 형태 있는 이미지로, 소리 주파수들은 구조가 있는 멜로디로 변환하여 의식에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기존의 마음 데이터와 관계 맺게되면, 드디어 이해가능한 ‘인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이미지와 멜로디는, 우리의 마음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변환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내면에 맥락있는 데이터로 쌓이지 않게 됩니다. 빛과 소리가 그렇게 구조를 갖추고 쌓여 경계지어지고 특정 모습으로 상(相)을 만들어야만, 우리 마음은 그것을 특정한 어떤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감각으로 들어오는 모든 감각 정보는 그렇게 ‘의미’라는 ‘경계(境界)와 한계’로 이루어진 ‘무엇’이 아니면, 축적되지 않고 그저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마치 쌓이지 않고 흘러 바다로 가버리는 강물처럼. 그와 같이 무언가 내면에 쌓고 오래 기억을 하려면 스토리를 만들어 연관시켜야 하듯이, 모든 정보는 그것들에 ‘경계’가 지어져 분별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수많은 주파수 중에 20~20,000Hz에 경계지어 ‘가청주파수’라고 이름 붙이고 우리가 기억하고 이해하듯이. 우리 마음은 이렇게 정보를 쌓고 사용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분별을 일으키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보가 거친 경계를 가진 감각정보인가 아니면 미묘한 경계를 가진 미세한 무의식적 느낌정보인가에 따라 의식적인가 또는 무의식적인가를 결정짓는 기준이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생래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감각기관과는 달리, 미묘한 무의식적 느낌 차원의 정보는, 그 의식적 분별이 대부분 연습에 의한 후천적 민감성에 의지하기에, 사람에 따라 그 ‘인식’의 정도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 색은 의식적인 눈으로 볼 수 있지만, 빨강 이하의 원적외선 에너지 정보는 보이지 않고 미묘한 체감각적 열기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와같이 무의식적 느낌에 대한 민감성을 기르면 의식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미묘한 느낌을 살펴 파악하는 연습을 하게 되면, 타인의 마음을 민감하게 느끼고 그가 함정에서 빠져나와 해결책을 찾도록 적절하게 질문할 수 있게 됩니다. 통찰력 게임은 바로 이 미묘한 느낌을 발견하는 연습이기도 하며, 또한 이 느낌에 민감할 때라야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more
소크라테스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나 깊은 의문이 들 때마다 멈춰서서 내면의 무언가에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다이몬입니다. 그래서 그가 불편함의 신호를 보내주면 행하지 않고,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행했다고 하는데, 그가 마지막에 아테네 법정에서 죽음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에 의해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있었지만 다이몬이 독배를 마시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을 주지 않았기에 그대로 독배를 마시고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소크라테스를 영원한 지혜의 상징으로 인류사에 남게 해주었습니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소크라테스의 스승인 디오티마가 다이몬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에 의하면 다이몬은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신이 인간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지만 다이몬을 통해 그것의 해석이 가능하며, 반대로 인간이 신에 전하는 간절함도 다이몬을 통해 신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호는 ‘느낌’을 통해 소크라테스에게 전해졌습니다. 통찰은 바로 이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소크라테스가 곤경에 처해 무언가 간절히 지혜를 필요로 할 때 내면에 질문을 던지면, 신에게 이르는 내면의 중간자인 다이몬을 통해 그 답을 들은 것과 같이, 우리 역시 간절함을 가지고 내면에 질문을 던지면 어딘가에서 그에 대한 답이 느낌을 통해 의식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간절함’과 ‘느낌’, 이 두가지를 통해 우리 의식은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느낌’을 사용하는 통찰력게임은 그 과정을 쉽게 해줍니다….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