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해낸 토마스 에디슨은,
초등학교 3개월을 다닌 것이 정규교육의 전부였습니다.
많은 발명가들 역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위대한 발명가가 되는 것일까요?
그들은 체계화된 기존의 ‘앎’에 묶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기존의 앎이라는 ‘질서’가 확고히 자리잡지 않았기에
창조적인 ‘혼돈’이 일어날 여지가 있는 것이지요.
그 혼돈 속에서, 뭔가 가능할 것 같은 느낌으로 지속적인 에너지를 쓰면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기존의 지식체계에 묶이지 않을 때,
불가능하다고 미리 결론짓는 ‘앎’에서 해방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명의 단초가 됩니다.
통찰을 일으키는 과정도 그와 같습니다.
통찰은 ‘알던 것’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의식적 앎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이 온 후 나타나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던’ ‘이것’과 ‘저것’은 서로 분리된 것인데,
거기서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경계무너짐의 혼돈이 온 후에,
이 둘을 하나로 인식하는 새로운 ‘통찰’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입자(粒子)적인 ‘생각의 세계’에서는 칠판과 분필과 지우개가
서로간 경계가 분명한 ‘개별적인’ 사물입니다.
그러나 파동(波動)적인 ‘느낌’의 세계에서는
칠판과 분필, 지우개는 서로 뗄 수 없는 한덩어리 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가지는 서로에게 어느 하나라도 없어서는
크게 쓸모가 없는 단편이기 때문이지요.
분필은 칠판 없이 사용할 수 없으며, 지우개는 분필이 없는 곳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 모두는 ‘하나’라는 새로운 통찰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혼돈인 느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질서인 통찰입니다.
느낌의 세계에는 명확한 경계선이 없습니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원 섭섭하다’라는 표현이 가능한 것이지요.
그가 떠나서 시원함도 있지만 반면 오래도록 함께 하다 떠나니 섭섭함도 있는 것,
이 상반된 두 개의 감정을 하나로 표현한 것이 시원섭섭하다는 느낌의 세계입니다.
이렇게 명확히 경계지어진 ‘생각’의 세계에서 모호한 혼돈인 ‘느낌’의 세계를 지나,
드디어 새로운 질서인 통찰은 탄생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 느낌에 민감해지기, 이것이 통찰로 가는 지름길이며,
느낌을 주된 초점으로 진행하는 통찰력 게임은 바로 이런
무의식적 직관의 세계에 민감하게 깨어있도록 해주는 도구입니다….more
– 이원규 두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