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커피잔과 펜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공간이 있습니다. 사물과 사물을 분별하게 하는 것은 그 사이의 공간입니다. 그와같이 마음속 현상의 분별도 내적인 공간을 기반으로 합니다. 내적인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그냥 다르다, 아니다.’라는 느낌으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즉, ‘이 느낌과 저 느낌이 다르다.’는 인식이 곧 느낌의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을 대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외적인 사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의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눈앞에 있는 탁자의 외부 경계선 한점에 눈의 초점을 맞추고 오래도록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그 경계의 느낌을 느껴봅니다. 맨 처음 본 그대로 경계선이 유지되나요? 경계선이 왔다 갔다 하거나 희미해지거나 모호해질 것입니다. 시각적으로 맨 처음 보았던 경계선의 느낌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경계선은 변하는데, 우리는 ‘저건 탁자지. 그리고 탁자는 탁자 아닌 것과는 완전히 달라.’라는 생각으로 처음 본 그 경계선의 느낌을 완전히 고정시켜버립니다. 실제 눈으로 보는 느낌은 고정돼 있지 않고 달라지는데, ‘탁자’라는 이름을 붙여 놓으면 그때부터 그 경계선이 변함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이름’은 느낌을 고정시키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의식’은 고정화된 느낌에 붙여진 ‘이름’들의 네트워크인 ‘생각’으로 작동합니다.
생각으로는 새로운 통찰을 이루기 힘든 이유가 바로 이때문입니다. 의식의 세계는 고정되어 ‘아는’ 것들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통찰은 고정화되지 않은 느낌들로 가득한 무의식에 접속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거기서는 다른 느낌들과의 통합이나 새로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무한히 있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의식에 접근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 통찰력게임은 절실한 ‘주제’를 요구합니다. 그 다음으로 결론내지 않은 마음으로 기다려보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이 ‘이 일은 이렇게 될 것이다’거나 ‘저렇게 되어야 맞아’라는 생각에 고정되지 않은 채 모호한 상태로 있게 되면 틀지워진 ‘생각’에서 열린 가능성의 ‘느낌’으로 다가가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느낌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 그릇이 깨질 때 느낌은 자유롭게 다른 느낌들과 만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통찰에 이르게 됩니다. 통찰을 위해 우리는 다시 그 느낌의 모호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결론내지 않는 찾는 마음으로, 주제를 향하여…more
이원규 두손